첫 문장들.
-늦은 밤 공사는 중단된다. 역사를 중심으로 길을 넓히고 도로를 다지던 작업이 멎고 인부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도시 전체가 죽은 것처럼 고요하다. 제 그림자를 밟고 서 있는 포클레인이나 불도저 곁을 지난다. 조감도를 비추는 조명이 환하다. 길을 넓히고 다지는 일들일 끝나면 광장 중앙에 분수가 설치되고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크가 완성될 것이다. 조감도 속 역사는 지금보다 화려하고 크고 아름다워 보인다.
캐리어를 끌며 역사 주변을 한 바퀴 더 돌기로 한다. 운이 좋으면 낮엔 보지 못했던 적당한 자리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빈자리를 함부로 차지하는 건 위험하지만 나는 호기를 부린다.
배경묘사로 부터 시작한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사람에게 주위를 설명해 주듯 배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캐리어를 들고 역에서 노숙 생활을 시작하는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기승전결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한 사건이 시작해서 점점 갈등이 고조되다가 해결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다만 절망과 희망, 그리고 절망과 희망, 또 다른 절망과 희망의 반복이다. 그래서 책장이 넘어갈 수록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사건과 반전속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쯤 가라앉은 기분으로 먹먹하게 책장을 넘겨가게 된다.
주인공이 노숙을 시작한다. 거리에서의 삶을 택하고 어떠한 희망도 가지려 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희망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 찾아온다. 거리의 여자를 만나고 그녀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완전한 절망속에 몸을 던지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점점 아파오는 그녀를 위해 그는 일자리를 가진다. 철거구역의 주민들을 쫓아내는 일이다.
-일단 거기서 내려와요.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제 학생을 타이르듯 차분한 목소리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난간 가까이로 걸어간다. 사람들을 끌어낼 땐 우물쭈물하던 그가 지금은 조금 우쭐해져 있다고 나는 느낀다. 또박또박 하는 말들도 자신감에 차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최 선생의 말과 행동이 우습게 여겨진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그런 말들로 저 남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남자가 난간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보다 어떻게든 삶을 유지하는 게 옳다고 여기는 것도. 동의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오지 말라고 우물거리던 남자가 말한다.
다, 당신들은 몰라요. 우, 우리는 가진 걸 다 잃고 길, 길바닥으로 쪼, 쫓겨나야 하, 합니다. 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이봐요. 일단 내려와서 이야기합시다.
다, 당신들. 여, 여기 있는 사람들이 부,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알아요. 알지요. 그런데 살다 보면 말입니다...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나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최 선생의 다음 말에 구역질을 느낀다. 모든 불운과 불행의 책임을 삶에 전가하는 건 얼마나 쉽고 비겁한 일인가. 저런 식이라면 그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 더한 것들도 습관처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다고 위로한다면 삶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까.
이게 젤 밑바닥인 거 같지? 아냐. 바닥 같은 건 없어. 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
그와 그녀는 그렇게 거리에서 산다. 하지만 그녀는 밤에는 모든 걸 주지만 낮에는 말이 없다. 술 없이는 살지 못하는 그녀는 날마다 그를 벗어나 길거리 술판에 합류하여 술을 마시고는 아무 남자에게나 몸을 허락한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분노를 느끼고 절망하고 또 다시 그녀를 찾는 일들을 반복한다.
-그때, 여자가 있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런 걸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주먹 크기 만한 덩어리를 굴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다랗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걸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주먹 크기 만한 덩어리를 굴려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커다랗게 만들 수 있었다. 기대와 가능성 따위는 쉽게 몸집을 불렸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지자 그것들은 쉽게 허물어졌다.
여전히 그런 걸 희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 (...)
밤에는 온몸의 감각들이 이제는 없는 여자를 향해 예민하게 곤두선다. 여전히 나는 광장 어디에서나 여자와 함께 있던 나를 볼 수 있다. 이곳을 떠나지 않은 한 그런 기억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것 때문에 기필고 광장을 떠나겠다고 마음먹는다. 몸을 일으켜 광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면서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둔다.
계속해서 사건은 이렇게 지나간다. 그는 그녀를 분노하지만 원한다. 그녀는 그를 원하다가도 어딘가로 불쑥불쑥 떠나가버린다. 그는 돈을 벌고, 잃고, 아무나 때리고, 아무에게나 맞는다.
-제대로 씻지 못한 내 몸을 여자가 핥는다. 내 몸에서 풍기는 온갖 악취를 견뎌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한다. 숨을 몰아쉬고 기침을 하면서도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이제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라는 듯 여자는 필사적이다. 그런 여자에게 그만하라고 말할 용기가 없다.
심장 소리가 거세진다. 그러면서도 머리로는 우리의 행위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발가벗은 욕구만 남은 이 행위를 어떻게 사랑이나 애정이라는 달콤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가.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짓거리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다.
우리는 지저분한 몸을 내보이고 비비고 마주 댄다. 그러면서 굶주림 같은 욕망을 해소하는 데에만 몰두할 뿐이다. 누군가 길 위에서 그러고 있는 우리를 본다면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욕을 하거나 구역질을 해댈 것이다. 센터 직원들이 길 위에서 동물처럼 뒹구는 우리를 두고 수군거린다는 것을 안다. 더럽다느니 끔찍하다느니 하는 말을 엿들은 적도 있다.
살아 있는 내 육체가 혐오스럽다. 사는 게 이토록 힘겨운데 쉬지 않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돌고 허기를 느끼고 다른 누군가의 체온을 바란다는 게 징그러울 정도다. 인간다움과는 먼 이런 방식으로 내 몸이 바라는 걸 해결해줘야 한다는 게 끔찍하다. 아무렇게나 아무데서나 몸을 섞고 신음을 내뱉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가 짐승과 다를게 무엇인가.
작품 해설에서 세 가지의 독법을 추천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문제에 대한 이야기. 지독한 사랑 이야기. 완전한 절망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세 번째 독법으로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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