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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2015

[15-27]피로사회 - 한병철

개인적으론, 주변에서 자주 들려왔던 추천의 말처럼 대단한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생각할 거리는 많이 주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탁월했다. 책의 제목도, 표지의 색도, 크기도 잘 어우러졌다. 허나 뒤에 붙어있는 '우울사회'는 약간의 사족처럼 보였고, 중간중간에 들어가있는 어떤 다른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나 은유 등이 생각을 방해했다. 내가 철학에 문외한이라 그렇게 느꼈을 지 모르겠지만 -아니 어쩌면 내가 이 책에서 기대했던 바를 끝까지 다루어주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피로사회'라는 핵심주제에 대해 더 언급해 줬으면 하고 바랬다.


웃기지만 문득, 저자의 약력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금속공학과를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전공했다는 약력이 그럴싸해 보였다고. 금속공학은 독일과 닮아있다. 그리고 독일은 철학과 닮아있다. 어찌보면 금속에서 철을 연상해서 철학과 닮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글들을 인용해본다.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갈라놓는 규율 기관들의 장벽은 이제 거의 고대의 유물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규율사회가 성과사회로 변모하면서 일어난 심리적, 공간구조적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주 사용되는 "통제사회"와 같은 개념 역시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는 데 적절한 것이 못 된다. 그런 개념 속에는 지나치게 많은 부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노'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이것이다. 과거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규율사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무엇을 하면 안되고, 무엇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 이것이 규율사회이고 지금의 우리는 이것에 본능적인 반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탈규율화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이 책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섞여 있는 부분이다.-

이미 과거 규율사회는 교묘한 방식으로 성과사회라는 이름을 달고 바뀌어있다. 저자의 말대로 예스 위 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통찰이 바로 이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 책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헬조선, 노오력, 아프니까 청춘이다. 요즘의 키워드가 바로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과거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어쩐지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착취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를 읽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알랭 에랭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자했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현대사회의 늘어나는 우울증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설명한다. 우울증은 '나'이길 강요하며, 성과를 내야하고, 자기 계발에 강요 속에서-이것은 스스로가 부과한 강요이다- 그러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지침이다.

시험은 잘 봐야 되는 것이다. 영어도 잘 해야 하고, 제 2외국어 하나쯤은 할 수 있어야 하며, 악기 하나쯤은 다뤄야 한다. 성과사회 속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성과를 내는것과 연관되어 스스로 강박을 부과한다.


-먹이를 먹는 동물은 이와 동시에 다른 과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를테면 경쟁자가 먹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고, 먹는 중에 도리어 잡아먹히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새끼들도 감시하고, 또 짝짓기 상대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동물은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에 사색적으로 몰입할 수 없다. 언제나 그 배경의 사태도 계속 정신적으로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티태스킹뿐만 아니라 컴퓨터 게임과 같은 활동 역시 야생동물의 경계 태세와도 크게 다르지 않는 주의구조, 넓지만 평면적인 주의구조를 생산한다.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멀티테스킹에 대한 통찰도 흥미롭다. 멀티테스킹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된 이 능력에 대하여, 저자는 사실 사색을 방해하고 성과를 내기에 최적화된 일을 스스로 시작하게 된다고 말한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이 책에서 이에 대한 대안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시대상을 어떤식으로든 규명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판단은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 태어났으니 죽창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순응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스스로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더 큰 지식에 대한 욕구, 더 많은 효율을 내는 것, 더 똑똑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성과-자본-경쟁과 연관되어 '피로사회'라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만들어졌다. 이것을 부정하고자 '나는 최고의 기계부품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일을 멈추겠어.'라고 생각하는것은 어쩌면 멍청한 일이다. 다만, 내가 어떤것을 하고자 할때, 어떤 것에 노-력을 해야할 가치를 느낄때, 현재 사회를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이기에 해야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방법중 하나는, 자신의 철학을 확고하게 하고, SNS등에서 떠드는 다른이들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는 든든한 내적 세계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