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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2015

[15-29]풋내기들 – 레이먼드 카버

카버의 책은 처음이었다들었던대로무언가 극적이고 반전이 있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었다직접적인 위로를 건내지 않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담은 단편들을 그저 늘어놓으면서 스스로를 따듯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듯 하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한단다카버같은 형식의 단편들을일상적인 소재를 다루고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게 다루고또 어떠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것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카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미니멀리스트라는 명칭을 떠올린다그렇다면 미니멀리즘은 어떤 스타일을 가리키는가몇 가지 특징을 들어보자문장이 짧다단어가 쉽다인물의 생각이나 느낌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행동과 말 위주로 보여준다치렁치렁한 표현과 과장을 피한다결말에서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그저 암시하거나 뭔가를 드러내는 데서 그친다일상적인 소재를 다른다이런 특징만 보자면 카버는 미니멀리스트인 것 같다.

 


죽 읽어나가다 보면 고요해진다한 절반쯤 읽고나서 밖을 걷다보면 세상이 미묘하게 다르게 보인다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고지나가며 자주 보던 거리와 건물들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듯 하다.

 

17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흥미로운 것은 단편들중 거의 대부분이 남자-여자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굳이

사랑에 대한 관계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남자와 여자 사이혹은 그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그리는 것이다또한 거의 모든 작품에 이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다어쩌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지만기억나지 않는다그 순간 나는 우리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소파 쿠션 아래 반 파인트들이 위스키인지 보드카인지 진인지 스카치인지 테킬라인지를 예전에 숨겨놓은 걸 기억해내고 아내가 곧 일어나서 부엌으로화장실로차고 청소하러 바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다들 어디 있지

 

-나는 모텔로 돌아가서 홀리와 함께 사무실을 닫고얼음과 잔과 티처스를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왔다우리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침대에 기대어 술을 마시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컬러 TV를 보며 즐겁게 놀았고 아래층에서 전화가 울려도 내버려두었다스카치를 마시고 아래층 홀의 자동판매기에서 가져온 치즈 크리스프를 먹었다정자 

 

-우리는 둘 다 아주 긴장했다부엌에 앉아서 한참 맥주를 마셨는데그 여자가 자기 생각들을 비밀이라고 하면서 들려주기 시작하더구나나는 긴장이 풀리면서 좀더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고그래서 나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지외도 

 

-제리는 맥주를 비우더니 캔을 우그러뜨렸다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나가면 어떨까차 몰고 좀 돌아다니다가 맥주나 한잔 하자젠장남자가 일요일에 집에만 있다가는 썩어버린다고.” “난 좋아그러자여자들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우리끼리 가는거야알겠지젠장가족 야유회는 됐다고우리끼리 맥주나 좀 하고 온다고 해차에서 기다릴게내 차로 가자.” 여자들한테 우리가 나간다고 해 

 


번역본 제목은 풋내기들이다사실 썩 좋은 제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풋내기들이라는 제목을 기억한채로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제목과의 연관성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그러나 원제 beginners로 생각해보면금새 유사성이 보인다처음으로 일어난 일혹은 겪은 일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아내 혹은 여자친구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거나누굴 처음으로 죽이거나누굴 처음으로 죽인 이야기를 듣거나갑작스럽게 관계에서 무언가 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거나 하는 등.

 

우리가 처음으로 겪을 수 있는 일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사랑 혹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그래서인지대부분의 소재가 사랑 혹은 죽음을 담고 있다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술에 대해서도처음으로 겪은 일들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 겪은 일들을 죽 늘어놓고만 있을 뿐어떠한 결말이나 결론교훈 등은 담겨있지 않다주인공들이 사건을 겪어 나가다가그러다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풋내기들이 좋지 않은 제목이라고만은 말할 수가 없겠다. beginners에서 위의 느낌들을 담은 제목들을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풋내기들애송이들초보자들... 아무래도 어려운 뉘양스이다.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을 때일정 분량의 글을 적어두는 버릇이 있다작가마다의 문체분위기느낌 등을 스케치하는 것이다나중에 책의 내용이 금방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이런 인용구를 보면서 작가의 느낌이 확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그런데 스코티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부부는 스코티 친구들에게 모조리 전화해보았는데그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집에 있었다앤과 하워드는 고속도로 부근의 들판 끝에 있는 스코티의 판자와 바위 요새로 아이를 찾아 나섰지만그곳에도 아이는 없었다. (...) 아이들은 맥주캔을 나무토막 위에 줄지어 늘어놓고 그것을 개울로 흘려보냈다개울이 고속도로 한쪽 면과 맞닿으며 끝나는 곳에는 지하배수로가 있었는데뭐든지 파이프 속으로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물이 부글거렸다스코티의 친구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스코티를 개울둑에 두고 떠났다스코티는 자긴 거기 더 있겠다고더 큰 배를 만들겠다고 했다앤은 개울둑에 서서 물이 지하배수로 입구로 쏟아져들어가 고속도로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앤이 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백했다아이는 그 안으로 떨어졌고 지금도 분명 지하배수로 안 어딘가에 끼여 있을 것이었다무시무시한 그 생각너무 말도 안 되고 압도적인 그 생각을 앤은 마음에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하지만 앤은 그렇게 된 거라고아이가 그 안에그 지하배수로 안에 빠진 거라고 생각했고이제부터는 스코티가 없는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하지만 그런 사실 앞에서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앤은 무릎을 꿇었다급류를 응시하며신이 허락해서 스코티가 돌아와준다면스코티가 기적적으로 지하 배수로에서 벗어난다면그렇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그렇게 된다면그들 부부가 스코티를 되찾도록 신이 허락해준다면어떻게든 아이가 지하배수로에 끼이지 않게만 해준다면그러면 자신과 하워드가 인생도 바꾸고 모든걸 바꾸고서 전에 살던 작은 도시로 돌아가겠노라고외동아들을 무자비하게 앗아갈지 모르는 이 대도시 근교에서 멀어지겠노라고 약속했다. (...) “이 녀석 숨어 있었어.” (...) “세상에어찌나 무섭던지하느님어찌나 겁나던지.” 앤은 하워드가 아까는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안심했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하워드는 앤이 어땠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알 수도 없었다마음속에서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이 얼마나 빠르게 스쳐갔는지 생각하니 앤은 자신이 의심스러웠다사랑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충분히 사랑했다면 그렇게 금방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텐데앤은 이런 미친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앤은 점점 힘이 빠져서 스코티를 내려놓아야 했다세 사람은 남은 길을 같이스코티를 가운데 세워 다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갔다별 것 아닌 것 같지만도움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