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버의 책은 처음이었다. 들었던대로, 무언가 극적이고 반전이 있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었다. 직접적인 위로를 건내지 않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담은 단편들을 그저 늘어놓으면서 스스로를 따듯하고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듯 하다. ‘미니멀리즘’이라고 한단다. 카버같은 형식의 단편들을.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게 다루고. 또 어떠한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 것.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카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미니멀리스트라는 명칭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미니멀리즘은 어떤 스타일을 가리키는가? 몇 가지 특징을 들어보자. 문장이 짧다. 단어가 쉽다. 인물의 생각이나 느낌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행동과 말 위주로 보여준다. 치렁치렁한 표현과 과장을 피한다. 결말에서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그저 암시하거나 뭔가를 드러내는 데서 그친다. 일상적인 소재를 다른다. 이런 특징만 보자면 카버는 미니멀리스트인 것 같다.
죽 읽어나가다 보면 고요해진다. 한 절반쯤 읽고나서 밖을 걷다보면 세상이 미묘하게 다르게 보인다.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고, 지나가며 자주 보던 거리와 건물들도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 듯 하다.
17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단편들중 거의 대부분이 남자-여자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사랑에 대한 관계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남자와 여자 사이, 혹은 그 주변에 일어나는 일을 그리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작품에 ‘술’이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우리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소파 쿠션 아래 반 파인트들이 위스키인지 보드카인지 진인지 스카치인지 테킬라인지를 예전에 숨겨놓은 걸 기억해내고 아내가 곧 일어나서 부엌으로, 화장실로, 차고 청소하러 바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 있지? 中』
-나는 모텔로 돌아가서 홀리와 함께 사무실을 닫고, 얼음과 잔과 티처스를 가지고 위층으로 올라왔다. 우리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침대에 기대어 술을 마시며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컬러 TV를 보며 즐겁게 놀았고 아래층에서 전화가 울려도 내버려두었다. 스카치를 마시고 아래층 홀의 자동판매기에서 가져온 치즈 크리스프를 먹었다. 『정자 中』
-우리는 둘 다 아주 긴장했다. 부엌에 앉아서 한참 맥주를 마셨는데, 그 여자가 자기 생각들을 비밀이라고 하면서 들려주기 시작하더구나. 나는 긴장이 풀리면서 좀더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나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지. 『외도 中』
-제리는 맥주를 비우더니 캔을 우그러뜨렸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나가면 어떨까? 차 몰고 좀 돌아다니다가 맥주나 한잔 하자. 젠장, 남자가 일요일에 집에만 있다가는 썩어버린다고.” “난 좋아. 그러자. 여자들한테는 내가 얘기할게.” “우리끼리 가는거야, 알겠지. 젠장, 가족 야유회는 됐다고, 우리끼리 맥주나 좀 하고 온다고 해. 차에서 기다릴게. 내 차로 가자.” 『여자들한테 우리가 나간다고 해 中』
번역본 제목은 ‘풋내기들’이다. 사실 썩 좋은 제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풋내기들’이라는 제목을 기억한채로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제목과의 연관성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원제 beginners로 생각해보면, 금새 유사성이 보인다. 처음으로 일어난 일, 혹은 겪은 일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아내 혹은 여자친구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거나, 누굴 처음으로 죽이거나, 누굴 처음으로 죽인 이야기를 듣거나, 갑작스럽게 관계에서 무언가 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거나 하는 등.
우리가 처음으로 겪을 수 있는 일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사랑 혹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소재가 사랑 혹은 죽음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술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겪은 일들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 겪은 일들을 죽 늘어놓고만 있을 뿐, 어떠한 결말이나 결론, 교훈 등은 담겨있지 않다. 주인공들이 사건을 겪어 나가다가, 그러다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풋내기들이 좋지 않은 제목이라고만은 말할 수가 없겠다. beginners에서 위의 느낌들을 담은 제목들을 어떻게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풋내기들, 애송이들, 초보자들... 아무래도 어려운 뉘양스이다.
어떤 작가의 책을 읽을 때, 일정 분량의 글을 적어두는 버릇이 있다. 작가마다의 문체, 분위기, 느낌 등을 스케치하는 것이다. 나중에 책의 내용이 금방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이런 인용구를 보면서 작가의 느낌이 확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코티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 부부는 스코티 친구들에게 모조리 전화해보았는데, 그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집에 있었다. 앤과 하워드는 고속도로 부근의 들판 끝에 있는 스코티의 ‘판자와 바위 요새’로 아이를 찾아 나섰지만, 그곳에도 아이는 없었다. (...) 아이들은 맥주캔을 나무토막 위에 줄지어 늘어놓고 그것을 개울로 흘려보냈다. 개울이 고속도로 한쪽 면과 맞닿으며 끝나는 곳에는 지하배수로가 있었는데, 뭐든지 파이프 속으로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물이 부글거렸다. 스코티의 친구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스코티를 개울둑에 두고 떠났다. 스코티는 자긴 거기 더 있겠다고, 더 큰 배를 만들겠다고 했다. 앤은 개울둑에 서서 물이 지하배수로 입구로 쏟아져들어가 고속도로 아래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앤이 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백했다. 아이는 그 안으로 떨어졌고 지금도 분명 지하배수로 안 어딘가에 끼여 있을 것이었다. 무시무시한 그 생각, 너무 말도 안 되고 압도적인 그 생각을 앤은 마음에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앤은 그렇게 된 거라고, 아이가 그 안에, 그 지하배수로 안에 빠진 거라고 생각했고, 이제부터는 스코티가 없는 삶을 견디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 앞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앤은 무릎을 꿇었다. 급류를 응시하며, 신이 허락해서 스코티가 돌아와준다면, 스코티가 기적적으로 지하 배수로에서 벗어난다면, 그렇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 그렇게 된다면, 그들 부부가 스코티를 되찾도록 신이 허락해준다면, 어떻게든 아이가 지하배수로에 끼이지 않게만 해준다면, 그러면 자신과 하워드가 인생도 바꾸고 모든걸 바꾸고서 전에 살던 작은 도시로 돌아가겠노라고, 외동아들을 무자비하게 앗아갈지 모르는 이 대도시 근교에서 멀어지겠노라고 약속했다. (...) “이 녀석 숨어 있었어.” (...) “세상에, 어찌나 무섭던지. 하느님, 어찌나 겁나던지.” 앤은 하워드가 아까는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안심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하워드는 앤이 어땠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알 수도 없었다. 마음속에서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이 얼마나 빠르게 스쳐갔는지 생각하니 앤은 자신이 의심스러웠다. 사랑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충분히 사랑했다면 그렇게 금방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텐데. 앤은 이런 미친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앤은 점점 힘이 빠져서 스코티를 내려놓아야 했다. 세 사람은 남은 길을 같이, 스코티를 가운데 세워 다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갔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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