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어디쯤 있는지 살펴보고, 돌아보면, 어느새 이렇게 되어 있음을 알게 될 뿐이다. 그렇다고 [재와 빨강]이 운명에 맞서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다거나,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송두리째 파괴되는지, 뭐 이런 내용을 다루는 책은 아니다. 다만, '재와 빨강'에 어울리는 어떤 장소나 상황들에 화자를 던져놓고 어떤식으로 행동하고 반응하고 생각하는가 지켜볼 뿐이다.
-장례를 치른 후 한달쯤 지나서였다. 방치된 집을 정리하기 위해 아버지가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를 불렀다. 냉장고를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인상을 쓰며 반찬그릇들을 식탁에 하나씩 꺼내놓았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해놓은 반찬들이었다. 반찬들은 곰팡이가 피거나 잔뜩 물러 쉰내를 풍겼다. 그는 방에 숨어서 보고 있다가 아주머니가 개수대에 쏟아버리려는 반찬을 낚아챘다. 건새우볶음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반찬이었다. 먹을 때마다 새우껍질이 잇새에 끼어서였다. 그는 질색하는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곰팡이핀 건새우볶음을 선 채로 꾸역꾸역 씹어삼켰다.
며칠간 심한 배앓이를 했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 혼자서 복통을 앓고 엉덩이가해질 정도로 설사를 하면서 그는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했다. 곰팡이 피고 흐물흐물해진 건새우가 구역질나는 냄새를 풍기며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방식으로, 몸과 마음에 통증이 번졌다. 그는 밤이 깊도록 혼자 앓아누워 어머니 없이 스스로 병수발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방역회사 직원이었던 그는 알수없는 이유로 C국으로의 파견이 결정된다. 동료 직원들은 그를 시기하고, 파견 시기는 계속해서 미뤄진 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만이 지속된다. 그러던 와중에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고 이혼하며, 아내는 그가 좋아하지 않는 다른 한 친구와 재혼한다. 결국 C국으로 파견되지만 그곳에는 전염병이 창궐해있고, 계속된 기침에 입국 검역소에 걸려 고초를 치룬다. 쓰레기로 가득한 C국의 4구역에서 방역을 이유로 건물에 갇히기도 하고, 아내를 죽였다는 오해에(어쩌면 진실일지도) 경찰에 쫓겨 부랑자가 되기도, 하수구에 들어가 살기도 한다. 결국 그를 C국으로 내몰았던 쥐를 잡는 일을 하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인생과는 하등 상관이 없고 그 말을 한다고 해서 무엇도 바뀌지 않으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게 분명한, 사소하고도 불필요해서 남들에게는 바보처럼 들리는 얘기들이었다.
그와 전처는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늘 꿈과 닿을 수 없는 미래,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과 달성에 대한 신념만을 말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럽거나 그립거나 되돌리고 싶거나 되돌리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해 말하면서 서로 겹쳐 있지 않던 시절을 유감스러워하며 흔쾌히 그 시절의 목격자가 되어주었다. 또한 사소하고 하찮아서 곧 기억에서 사라질 게 분명한 현재에 기꺼이 동참해주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각오나 희망에 대해서, 그것을 실행하려는 의지에 대해서, 맥없이 꺾여버린 의지에 대해서도 자주 얘기를 나눴는데 그럴 때는 과자오디지 않은 격려와 진심어린 위로, 소박한 응원의 말을 주고받았다.
결국 그가 무엇때문에 C국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는지, 그의 아내는 왜 죽었는지, 그가 죽인 것인지, 등의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그저 이러한 분위기와 이러한 상황, 쥐와 전염병과 방역과 쓰레기와 독감과 하수구와 부랑자, 전처와 유진과 어류선배와 노인과 몰, 뭐 이런것만이 계속될 뿐이다.
'독서기록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30]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7.09.21 |
---|---|
[16-29]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7.09.21 |
[16-27]호모도미난스 - 장강명 (0) | 2017.09.21 |
[16-26]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 (0) | 2017.09.21 |
[16-25]서쪽 숲에 갔다 - 편혜영 (0) | 2017.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