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구원의 연인을 만나는 일이 객관적으로는 우연이고 따라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에서 천천히 펼쳐지는 두루마리에는 이미 기록되어 있었따고 주장한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일생에 있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의미도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며, 두루마리 같은 것은 없으며(따라서 우리를 기다리는 미리 정해진 숙명은 없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에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기는 불안 - 간단히 말해서 아무도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지 않았고, 우리의 사랑을 보장해주지도 않았다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에는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이라는 보호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난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번의 삶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헌신을 한판의 달걀 이라고 본다면, 현재에 헌신하는 것에는 달걀을 과거와 미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담는 위험이 있다.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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