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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2017

[17-5]담배를 든 루스 - 이지

 중앙장편문학상, 세계문학상, 한겨레문학상. 국내 문학상 중에는 이 세 가지 문학상의 수상작들은 꾸준히 챙겨보는 편이다. 자본주의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을거라는 믿음 아래, 높은 상금을 받는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지금의 사회를 바라보는 괜찮은 방식들을 소개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6회 수상작 '담배를 든 루스'에서는 대학생인 주인공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며 있었던 일들을 줄거리로 한다.


 말이 '날씨 연구소'이지 이후에 바뀌게 되는 토킹바의 역할과 비슷하다. 사람들 마음속의 우울, 불안, 걱정 같은 비오는 날씨들을 칵테일 한잔과 함께 상담해주는 공간이다. 첫 장의 제목처럼 화자는 리즈, 리타, 혹은 유키라 불리기도 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순수언니나 사모, 다다 등으로 등장한다. 손님들 역시 요코, 피아노맨, 문어 등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화자는 그들의 물건을 상징하는 하나의 물건을 보는데, 베개나 코끼리 인형, 악기 같은 것들이 떠있다. 


 여기까지 이야기 했으면 상상할 수 있겠지만, 어딘가 현실에서 반발짝 쯤 둥 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소설속을 가득 메운다. 작가가 바라보는 시대의 모습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상을 3.5차원 즈음에서 바라보고 그려낸다. 작품 소개의 한 줄 로는 '이태원 우사단로에서 펼쳐지는 돈 없고 백 없는 어느 스물셋 인생의 경쾌한 일상 해체!'라고 씌여있지만, 읽다보면 유쾌하다기 보다는 슬프고, 슬프다기 보다는 독특하게 무감각해져 버린 화자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들 남을 의식하듯 스타일을 냈지만 사실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것, 뭔가 턱없는 제스처를 해 보이는 것, 어려운 책을 읽거나 새로운 음악을 찾아 듣는 것, 힙한 패션을 유지하는 것, 묻지도 않은 자신의 취향을 발표하는 것, 애완동물을 보살피는 것...... 이 모든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들의 시선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 16P

 

 지휘자가 있던 자리에는 그 대신 마른 개 한 마리가 바닥에 배를 대고 있었다. 열을 식히는지 잠들어 있는지 궁금했는데 다다와 내가 지나가자 일어났다. 그렇게 한 마리 두 마리 모이더니 서너 마리, 열 마리, 수십 마리가 되어 다다 뒤를 따랐다. 혹시 너희들 귀에도 들리니? 개들을 바라봤다. 다다의 머리에는 어느덧 악기들이 떠 있었다. 길에서 본 지휘자와 날씨연구소의 피아노맨, 지하철역의 트럼펫 연주자가 모여 연주를 하는 것처럼 소리가 웅장했다. 밤길에 술에 취한 사람들도 하나둘 모여들었다. 나는 다다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새롭게 흐르는 곡을 즐겼다. 음색이 바뀌어 바라보면 악기도 달라져 있었다. - 60P

 

 한숨을 쉬며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원했던 걸 막상 손에 쥐고 나면 보잘 것 없어지는 법이야.” 너무 원하는 것도 없고 무언가 가져본 일은 더더욱 없어 잘 모르겠지만, 삶의 숙제를 다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종종 했다. 그래서 천재의 요절이라는 게 있는 거겠지. 의무를 빨리 끝내면 모차르트처럼, 버지니아 울프처럼, 제임스 딘처럼, 제프 버클리처럼, 에이미 와인하우스처럼 떠나는 것 같다. 행복이 찾아올 때 죽는 것도 결국 같은 이치일까. - 112P